[김홍일쌤의 서양철학 여행] (18) 오컴의 유명론 (상)

입력 2017-10-23 09:00  

학문은 이성적 추론… 신학은 계시로 주어진다
이성으로 신학 증명 못해… 신앙의 순수성 보호




서양의 중세 후기는 대개 14~15세기로 잡는다. 이 시기는 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구축한 스콜라철학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고 이로 인해 철학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이 새로운 철학의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오컴이다. 사실 오컴은 그의 출생지이고 이름이 윌리엄이니까 정확히는 ‘오컴 출신 윌리엄’이라 해야 하지만, 간단히 ‘오컴’이라 불리다 보니 태어난 곳이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다.

오컴의 윌리엄

영국 런던 근교 오컴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되어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오컴은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학설로 고소당하여 이단 혐의로 아비뇽 교황청에 소환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의 궁정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오컴은 ‘중세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왕에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은 검으로 나를 보호하시오. 나는 당신을 펜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자신의 철학적 논쟁에서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보편 논쟁

아닌게 아니라 오컴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큰 ‘보편 논쟁’에서 유명론 측의 논객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보편 논쟁이란 보편적 개념이 개체로부터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개체에 앞서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하며, 개체만이 실재하고 보편 개념은 단순한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유명론이라고 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이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을 폈던 것과 달리 오컴은 보편자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만들어 낸 추상일 뿐이라는 유명론을 제시했다. 예컨대 까치, 비둘기, 독수리 등의 개별적인 새는 존재하지만, 보편자로서의 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다만 까치, 비둘기, 독수리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들을 개념적으로 정리한 이름뿐인 것처럼 말이다.

오컴의 유명론을 따라가 보자.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개별적인 사물들은 우리의 감각 경험을 통하여 분명하게 지각될 수 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보편자는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보편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개체의 세계에서만 머무른다. 오컴의 이러한 유명론은 보편자의 실재를 인정하는 스콜라 철학을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나아가 스콜라 철학에 기반을 둔 신학의 학문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학의 학문성과 관련하여 오컴은 어떤 학문이 학문성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먼저 필연적 명제이어야 하며 둘째 의심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셋째 필연적이고 명증한 명제들에 의해 삼단논법으로써 증명되는 명제일 때 가능하다고 한다. 이 조건에 비추어 볼 때, 경험에 의해서 검증되기 어려운 신학적인 주장은 참이라고 확증될 수 없다. 따라서 오컴에 의하면 신학의 학문성은 인정될 수 없다.

하지만 신학이 학문과 관계없다는 오컴의 주장을 신학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오해다. 왜냐하면 오컴이 보기에 신학의 개념들은 다른 학문이 다루는 명제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학문들은 이성적 추론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계시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컴이 보기에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진리와 믿음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 진리는 구별돼야 한다.

신앙에 이성 개입을 경계

이제 오컴이 주장한 바와 같이 신학이 계시된 신학이라는 점은 이성으로는 신학의 가르침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인간이 신학적 가설을 내세울 수는 있지만, 이런 가설의 진리를 이성에 의해서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컴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가진 논리와 이성은 신학의 가르침을 증명할 수 없다고 본다. 오컴의 의도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이러한 허약한 이성 위에 신앙의 기반을 세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교정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오컴이 신앙과 관계되는 영역에 이성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그가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해방하여 신앙과 신학의 순수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한 오컴의 유명론은 한편으로는 “다만 신앙뿐”을 외친 루터의 종교 개혁의,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새로운 근대 철학의 밑거름이 됐다.

◆기억해주세요

오컴이 보기에 신학의 개념들은 다른 학문이 다루는 명제와 성격이 다르다.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학문들은 이성적 추론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계시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컴이 보기에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진리와 믿음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 진리는 구별돼야 한다.

김홍일 <서울 국제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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